2012년 4월 26일 목요일

나이를 먹는다는 것.



어린 자식이 "자전거 함께 타자" 하면 ''너 조심히 잘 타는지, 봐야겠다 "며 솔직하게 저질체력을 고백하는 모습을 볼 때면, 지금 저는 제 나이의 삶에 최적화 되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그와 친구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다가 분명 다리에 힘이 풀렸음에도, 계속 인라인을 타겠다고 우기며 다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젊음이란 혹시 두려움과 설레임의 공존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투덜거리는 만큼 웃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는 사물을 바라 볼때에, 그것이 아닌, 자신에서 유래한 반영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에너지를, 의자 깊숙히 앉아 매운 담배 틈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세상과의 적당한 거리를 고심하며 허무한 권태로움이 뼈속 깊숙히 자리잡기를 저는 바라는지 모릅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라는경험으로 그들과 나를 구별하며 이해하려는 것이, 결국은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현 제 모습이 어떻게든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기반성적인 것이 될때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만함과 위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닌가.?생각해 봅니다.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의 것들이 생겨남에도 전문성으로 위로받고, 그 영역에서 자유로운 안위를 느끼며 세상을 음미할 때, 저는 비로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이 만든 정신의 왕국에서 자위하고 있음을 지금의 권태로움이 증명하는 듯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런 생각을 한 저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공감대 형성이라는 매체에 의한 혹은 이 시대가 권장하는 가치일 수도요. 전인적 것에서 그 일부만을 특화시켜 스스로의 완성보단 공동체를 통해서 완성하는 것을 권장하는 시대. 이것이 원인인지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15~16세기에 모든 것에 박식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노장에도 다방면에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들의 개념들은 지금 더욱 세련되고 정밀하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상이였을 지도요.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것은 나이가 원인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지(知)와 知의 실천이 항상 일치할 수 밖에 없는 동어반복적인 구조속에서 그 나이만큼 경험으로 확신되며 고착화되고, 그 결과 이 권태로움은 저와 세상 간의 불일치를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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