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9일 화요일

바라기

거울을 아래에서 위로 위로 끝내
얼굴만이 들어오면 굳어진다 끝나버렸다 
격정은 비명속에 조용히 갖혀있지만 기억은 
체념으로도 돌아오지 않는 '그래서 뭐.?'
꿈을 잃어버렸다 '그래야 한다'는 매력에 바라기
그것을 기억 못하겠다.
밥을 먹어도 술을 매일 마셔도 전에는 들리던 것들이
점점 조용하다 어쩌면 귀가 아닌 소리가 사라져
맴도는 것들은  망상이 밖으로 흐르는 것일지도
침묵은 이제 자각이 되어 출발하려 한다 수다.?
목적지가 그거라면 익숙함은 새롭다 하여도
새롭게 익숙하고 싶다.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조용함


화들짝 소스라칠 때 조용했었다는
바로 그 前을 고마워한다

이어폰의 볼륨만큼 밖은 분명 더욱 소란해져 
있을 것 노래 하나 
더 들어본다

간지러워 간질하려니
밖은 조용하고 꺼낸 이어폰은 
시끄러운 노래 하나 끝낸다

밖과 안이 동시에 조용한 
후회는 변명을 찾으며 비로서
조용함을 화들짝 누린다.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없음을 알 때.

모든 것이 떨구어진 담배에 갇힐 쯤, 시선은 바닥의 수 많은 자국을 세워본다. 흙, 껌, 시멘트, 밟혀진 꽁초 등등 어둑 어둑해도 사람들이 이 벤치에 앉아 어떤 식으로든 화창함을 즐겼을..

몇 개의 벤치가 비록 비어있어도 그들 자리 역시 여기와 같은 바닥문양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직접 거기로 가서 앉아 보고 또는 이 곳 말고 다른 곳도 그렇겠지라는 확신 혹은 안위도 생길 듯 하지만, 없기 전에는 있었어야 했다는 그런 막연한 감정.

순서는 남모르게 기억을 재 정비하나, 알아차리지 못한 나는 그들만을 볼 뿐인지도, 그리곤 그들 탓을 한다. 그러나 없음을 아는 사람들은 있음을 순서는 말해주는 듯 하다.

2012년 5월 10일 목요일

침묵

조용해 졌다
자동차가 배가 사람들이 수없이 오는데
내 숨소리만이
들린다

어두워 졌다
폭발하는 태양이 손등에 모이자
그림자는 세상을 덮고
내 눈만이
번득거린다

침묵이 묵념을
묵념은 세상 끝의 반기움을
어루만지며 여정을 풀어 제킨다

그러나 껴안은 너머를 보며 "저게 뭐야.?"
이미 수다쟁이가 된 침묵 
그로 인해 세상은 다시 
아름답게 되었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계(界)

세수 후 바라보는 곳 한발짝 다가가면 그 역시 다가오고, 두발짝 물러서면 그 역시. 왼팔을 들어 따라하지 말라면 오른팔을 드는, 그곳은 360도 뒤바뀐 곳이며 이 곳과 항상 같게 된다.

입김에 뿌여지니,그 역시 나를 못볼 듯한 그래서 함께 안개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나 역시 거울의 한 이면에 서 있어, 빛이 물을 통과하듯, 기어리 거울을 투과하여 그곳에 머물며 반영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반사는 표면에서만 일어난다'는 생각은 또 다른 세계를 '반영'이라 일축하며 더욱 그럴싸한 거울을 사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 세상을 만든 빛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설령 돌아왔다쳐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를 존경하기로 다짐해 본다.


2012년 5월 5일 토요일

객기

훈장이 된 상처 이제야 무엇들 보다 빛났던
이제야 고통이 되었다

떨어져 버린

착각의 현현함과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반성은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세상이,그를 만들려는 실천
그래서 바쁜지 모른다 어쩌면 바쁜 것은
못 느끼는지 이제야 고통이 되었기에
이제야

2012년 5월 4일 금요일

보는 것이 보인다

출발하는 버스 바쁜 듯
손 흔들다 걷는다


물끄럼한 뒷 모습보다 시계에 
닿았을 때 아쉬움이 된다


벌써 반갑지 않은 따가움을
손가리개 해 꼭 맞는 그늘을
만들 수 있다는 듯이


저기 다시 온다
일어나려는 힘은 보이는 것만을 여전히
볼 뿐이라고 힘겨운 듯 소리가
그것이 보여준다.

2012년 5월 1일 화요일

새로운 만남

어느 날 무심함에서 빛 하나 빼곰하더니 별이 되어 성큼 성큼 다가온다면 만남은 시작된 것이다. '똑똑함이','분위기가' 혹은 '자상함이' 그 핑계가 될지는 모르지만. 옷장은 왜이리 텅텅 비었으며, 양말은 왜 칙칙하며, 만남을 뒤로 하면  왜그리 시간은 짧아지는지

투덜거림은 만남이 된다.

이러한 행복으로 가득찬, 아마 그 빛을 처음 본 날이 돌아와, '엉성하게 생긴 것'이 너무나 자연스레 옆에 앉는 것을 볼 때, 애초의 시작은 온데 없이 투덜스러움은 투덜이 되어 만남.! 그것을 알아차린다.

만남은 투덜이 된다.

처음은 사라졌고, 지금은 새로운 처음.. 이것은 만남의 이유가 달라졌으며 또한 '무식함이' '삭막함이' '우유부단함이' 애초의 것들과 반하여 있다는, 기준의 다른 면이 그렇게 멋졌던 만남을, 그 자체를 음미하는 것으로  도약-성숙시킨다.

만남이란 유심한 무심이 시선을 고정하면서 바로 한 곳 무심한 유심을  쳐다본다는 것을 또한 이별은 잘못에 대한 댓가가 아닌, 그것이 자신을 솔직하게 들어낼 때에만 겪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제 투덜거림은 만남임을 알게 되었다.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새로움

꽃에 붙은 눈 하나 녹아서
미끄러지듯 땅은 따뜻해진다.

나무가지 화사하게 우러러
경외하듯 바람은 덥다고 야단친다

두꺼워야 할 것들이 제대로 그러하다
생각될 때

새로움은 "뭐야. 나를 볼 수 있는거야?" 그렇게
이렇게 새로운 것은
낡은 지식-경험이 된다.

2012년 4월 27일 금요일

피곤

화들짝 피어난 꽃이 인도하는 구석구석을 걷다, 보이는 의자에 앉아 보았다. 모든 것은 색이 되었고 되려 했다. 거기에 사람들은 제각각 인도되는지 흩어졌다 모였다. 그런데 무리에서 떨어져  앉아 한 모금 두 모금 물을 마신 후 사탕 하나를 입에 넣는 그. 내가 지금 하는 것과 똑같이.


그것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에 감탄도, 단 것을 입안에서 굴리며 그 달콤함을 음미하는 것도 아닌, 피곤 그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제야 보이는 모든 것들이 불구하고 단일한 것으로 표현되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떨어져 있다는 것 애초에 만끽할 수 없는 것 앞에 착각이란 狀을 보며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그 사람은 무리에 섞여 건넨 물을 보며 웃었다. 나는 그들을 등지며 일어나 입이 말하는 소리 '피곤한 봄이네'를 들으며 이 봄은 다시 하나가 된 건지 가봐야 할 곳이 많음을 알았다.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원과 회오리

권태로운 반지름은 그 결과 궤적을 그리고
발자국은 최초의 자신을 만나도
주저함 없이 밟는다


다름의 순간들이 동일한 반지름으로만 여겨지는
원은 그래서 순간도 반복시킨다.


햇빛이 유난하여 손가리개를 하는
곳 시간에 앉아 유난을 떨어 보자


그리고


낯선 바람 하나 불며 끝내 일어설 때
새로운 반지름을 찾은 순간은 前과 지금을
비밀스럽게 합쳐 바람 
회오리가 된다

태양은 모든 것을 밝게 하는가.?

요 며칠 지구에서 찍은 밤 영상 몇 개를 봤다.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으며, 은하수는 장엄하게 그 자태를 드러냈다. 지구가 우주의 조그마한 구석을 돌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충분하게 그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쏟아지듯 그랬다.


옛 사람들이 그렇게 확신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영상이 품어낼 쯤, 해가 다시 떠오르자 그 별의 군단은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곤 다음 밤이 올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별의 밝기가 작아서라기 보단 마치 지구와 그 군단 사이를 태양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였다. 이쯤에 이르자 태양은 지구를 밝게 하지만 뭔가를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치와 방향이 있다는 것은 애초의 자신을 떠나 여행중임을 암시한다. 지구에서 밤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구는 태양을 통해 우주로 우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순환

물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위로 올라간다. 하루도 오전에서 오후로 다시 오전으로 달려간다. 존재하는 것 모두가 이런 성질을 갖는지는 나는 모른다. 이 글을 순환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가 주 논의이다.


순환은 출발점과 도착점 그리고 이들을 향하는 두 방향이 각각 결합하지만, 우선순위를 두어 동시에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다. 즉 자기복귀적인 운동을 할 때에 우리는 순환한다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순환의 비동시성을 동시성으로 대체한다면, 이런 운동들은 일어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어떠한 움직임도 있을 수 없어, 있을 듯한 팽팽한 긴장감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과학시간에 작용과 반작용(마찰)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위의 글을 통해서 보면 뭔가 어색한데 그 이유는 순환은 작용과 반작용을 자신 하에서 어떻게든 연관시키려 하나, 이는 이들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고 연관시키려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을 연관시킨다는 것은 그 다름을 연관 그 자체가 자신의 속성으로 갖을 수 있는 주체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또한 이런 방법으로 순환 역시 대립물을 자신의 속성으로 하면서도 단일한 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성질을 드러내는지 모르겠다..

더움은 이 송글송글한 것으로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온도계를 찾는 시선들도
이때쯤 시작한다


이 송글송글한 것이 수건에 혼건할 쯤
사방은 온도계를 높이 쳐들며 이들을
수은 기둥의 재물로 삼는다


이제 여기 버려지고 저기에서 욕을 듣는
세상과 나의 하나됨은 쓸모 없어
시선은 밖으로만 달린다.


제국이 된 온도계는 그 기둥을 과학이라며
모든 것을 무관하게 만든다
나에게도 스스로 고개를 돌리게 하면서 말이다.

경험

흔히 '무엇을 알고 있다', '알게 되다'라는 의미로 경험이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이 두 시차는 '점진적인 知의 발현'이라는 경험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운동을 할 때, 그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는 첫 번째 경험에 직면하게 된다. 즉 '운동은 쉽다'라는 명제가 전제 되었으며, 운동을 통해 이를 부정하게 된다.


운동에 대한 첫 번째 知가 부정됨으로 인해서 이제 새로운 知가 연이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결국 경험의 최종 목적지인 '운동은 어렵다'라는 명제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자신은 자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최초의 전제를 무너뜨리며 전체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또한 경험이란 단순한 - 산발적인 지식 뭉치가 아니라 지식-명제를 체계적으로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식의 운동이라는 것이 된다.


이제 경험은 '무엇을 알고 있다', '알게 되다' 라는 두 명제가 상호 전제의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운동하는 객관적인 보편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은유

서로 다른 것은 일치하다 하는 은유는 '서로 다른 것은 일치한다 라는 명제는 오류이다'라는 것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얻는다.


또한 그의 대립 명제를 통해서 은유는 단순한 일치가 아닌, 타자 간에 동일한 속성을 찾고 확인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은유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양자를 포함하며 ,이를 자신의 속성으로 하는 보편자를 구현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과학시간에 나 혹은 사람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자연계는 존재한다고 배웠다. 특히 뉴톤의 '만유인력법칙'은 우주의 이런 법칙의 최초의 힘은 신의 키스라고 했다.


인간은 수동적인 관찰자로서, 외부 세계와는 철저히 단절된 체, 오로지 감각만을 믿으며, 이 세계는 이러하다. 이러더라라는 방법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수동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은유라는 것을 통해 혹은 점진적인 경험을 통해서 적극적인 인식으로 전환,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또한 인간이다.


더울 때 땀을 흘리며, 추울 때 온 몸을 떠는 것은, 우리는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일 수 밖에 없는 보편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기사 그리고 편집

하나의 사태'사건(Fact)이 기사화 되었을 경우, 이 양자는 결론적으로 항상 불일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사건이 기사화로 전환하는 데에는 이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흔히 편집이라고 불리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또한 이 편집은, 변환 혹은 치환이라 해석되는 매개로서 결과적으로 자신을 통해 이 양자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충실하게 충고하는 주체로서 타와의 관계없이 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한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화하는 작업은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기사화하려는 목적으로 편집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실제 있는 편집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기자 입장에선 그것이 편집 과정이 되는 것이다.

컴을 예로 들어 보면 입력과 출력이 컴을 통하여 이행되는데 컴의 애초의 목적이 이러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그래서 컴은 실제 단독적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이나 티비를 통해서 읽고 본 세상은 그들에게 존재할지는 모르나, 실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개인적으로 체험한 세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내가 우리가 느끼는 실망감 외로움은, 현실이라고 느껴지는 것에 대한 괴리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당연 그렇지 않을까 라는 것이 거꾸로 세상을 고착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봄비

화들짝 놀라 피어난 것들을
떨어트리며 봄은 길다고


길바닥 것들에 떨어지며
길어질 그것에 용트림을 주는


비로서 겨울을 품은 봄비가 되었다
그래서 봄비임을 알게 되었다.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도시에서도 그들이 마를 쯤
봄비는 화사한 생명들로 시끄럽게 나타날 것이다.

아쉬움 혹은 고마워할 줄 아는 능력

으레 있는 줄 알다 결국 없을 때의, 다친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잡을 때의 그 감정. 무심히 있던 것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당혹감은 해결과 함께 다시 무심한 것이 된다.


목표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다 문득 봄 날의 화사함처럼 찡그리며 태양을 가릴 때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그들이었고 그들이다.


미안함, 후회 이것은 행위의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이다. 결국 의도와 결과가 상이할 수도 있다는 경험과 함께 이를 수정하는 것이 반복이 될 쯤 '그럴 수도 있죠'라는 말은 이런 상황은 일상이 되었으며, 또 하나의 무심한 것이 태어났음을 뜻하게 된다. .


무심한 것은 그것이 유심한 것이 되었을 때에만 알아 차릴 수 있듯,어려운 젓가락질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그것이었으리라.


흔하디 흔한 하루를 반복하면서 뭔가 커다랗고 흥미로운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매 단계를 음미해 볼 때 무심한 것들이 고개를 들며,저절로 고마운 마음이 가슴 안에서 밖으로 솟구칠  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삶의 즐거움이든, 역동적이든 분명한 것은 내 밖의 어떤 것을 경외하며 동경하고 갈망하는 것은 멈출 것이며,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내부로 다시 들어와 호기심 많던 어린아이로 돌려 놓아줄 것 같은 기대..! 이런 기분이면 충분할 듯 하다.

시공간

시간은 자신을 던져 공간이 되고 이의 또한
그렇게 그가 된다


결국 찢겨지며 온 몸으로 퍼지는 고통을 벗어나려 자신을 꼬옥
감싸 안으며 발버둥을 쳐보나


그들이 이룩한 시공간 제국은 오히려 당연하듯
주인이 되어 채찍을 내리친다.


더욱 크게 숨을 쉬어라 더욱 크게 웃어라
나는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던 꿈이며 희망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권태 혹은 지겨움

권태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경험상 매우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더 창조적인 삶에 대한 동경이라고 보긴 보단, 그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감정을 지배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에게 "오늘은 재미있었니.?", "응.!! 언제나 재미있어. 오늘 친구들과..." 그런데 "아~. 또 시험이네. 지겹다 지겨워.!" 그도 지겨움에 투덜대는 것을 보면, 어린이이고 어른이고 지겹다 라는 것을 '내키지 않는 것의 반복'이라는 뜻으로 동일하게 쓰이는 듯 하다.


하지만 내 경우엔 즐거운 일도 지겨운 것에 속하는 듯하다. 즉 즐거운 일에 즐거워하고, 힘든 일에 힘들어 하면서도 더 흥분시키는 것 없이 차분하게 항상 결론을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교과서를 보면서 "보름달은 왜 생겨.?" 그래서 설명을 해 주니 '아하~.!' 내 자신에 대한 뿌듯함보단 걱정스러움이 앞서면서 "야..! 야~" 그런데 나와 그가 뭐가 다른 지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아하.' 아무리 기억을 하려 해도 초등학교 때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반가움 이기도 하지만, 기존 앎에 대한 부정(不正)이기도 하다.그런데 너무나 빨리 기존 지식을 뒤집을 수 있는, 그러면서 너무나 당연한 듯 웃으며 세상을 보는 그런 것. 바로 그것이 그와 나의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쓰는 단어는 어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뭐~", "장난하나.?" 혹은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마.!" 이 모두가 마치 절대적인 뭔 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전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지겨움' - 권태 이것의 원인은,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그대로 삶에 나타나도록 노력하기에 그 결과 수백만번의 '아하.~'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얻는 훈장은 아닐지.

권태 - 수백만번의 '아하'를 버리고 대신 자기 정신의 왕국을 통치하며 얻는... 그런 것은 아닐는지.

소속

자신이 타 특히 공동체의 가치와 충돌할 때에 소속은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타에 깊숙이  의존되어 있든지 아니면 이를 벗어나려는 것이든 이 양자는 우리들이 그와 마주칠 때에 겪는 공통점이며, 이것은 소속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개인 내면에서 본다면 이미 의존에 의한 익숙함과 익숙함을 더욱 큰 익숙함으로 바꾸려는 갈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에게서 이러 한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면 소속이란 것은 현 자신을 바꾸려는 너무나 개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타 혹은 공동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난 단지 이렇게 변하고 싶다' 라는 말을 '세상이 원하니까, 그들이 원하니까'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은 핑계일 뿐, 우리는 여기 있음에도 '꿈'이라는 뜻도 불명확한 그런 가치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사는 것이 목적인가.? 그로 인해 죽음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들의 과정인 내 삶을 읆조리는 것인가.?

폐에 감기가 걸리면
숨쉬기가 아무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상처난 손가락이 젓가락을 잡으면
아무런 것이 아님을 또 알게 된다.


아무런 것은 항상 이렇게 알게 된다.

아무렇게 하면 얻는 것은 아무런 것이라
아무렇지 않을 때에만 아무런 것을 만날 수 있다.

과학

이 학문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이의 성질을 밝히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 결과 현상과 법칙이 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주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인간과 자연은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 전제 되어 있다.


더 나은 이라는 명목 하에 개발이 이루어 질 때에 다른 쪽에서는 이로 인해 파괴된 만큼 자연은 우리를 위협할 것이라 주장한다. 이 양 주장은 자연에 대한 상반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자연과 인간의 동일-부동일 이라는 관계에 대해서는 모두 같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실은 아주 깊숙이 관여를 하고 있다고 가정을 해 보자. 이 말은 인간 의식의 변화에 맞추어 자연 역시 동일하게 변화한다는 것이며 인간과 자연의 일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흔히 자연에 대하여 개발-보존이라는 극단이 대립을 보이는 듯 하지만 이 양자는 동일한 전제 하에 행할 것인가.아닌 가.? 라는 결국 적극적인 것을 요구하지만, 애초의 질문인 자연과 인간은 별개-일체라는 명제는 쉽게 지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명제는 그의 전제를 부정하듯, 과학 역시 그를 부정하는 전제 위에 세워진 하나의 탑이라 진리를 부분적으로 밖에 전개할 수 없듯이 여전히 대상과 그에 대한 이해라는 전혀 별개의 것을 전제하는 한, 위의 갈등은 그의 수명 만큼 진행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시선을 따르다 뒤를 보니 길 하나가
따라 온다 발바닥이 끝점인지 출발점인지


유성 하나 드러누운 배 위에 떨어지니
그것이 끝점인지 아닌지를 알았다


변하지 않는 시선을 계속 따르다
진흙으로 된 저 너머 너머로 이어져 익숙한 길 하나


비로소 길은 그의 끝점에 도달했다
다시 가보지 않아도 아는 그런 것을

소리

멈추고 한 곳을 응시하면 그러다
마개를 하면 작아지는


결국 들을 수 있는 만큼 있다.


마개를 열고 멈춰진 한 곳 그러다
커지는


결국 그것만큼 할 수 있다. 나를 부르고
그것을 부른는
그것만 유일한 것이다.

'와~ 예쁘다 예뻐. 갖고 싶다.', '으허헉~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꿈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시각에 있는 나의 반영..! 그럼에도 좌절감을 주지 않는 좋은 것. 하지만 이의 실현이란 말을 들으면, 살짝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돈이 많이 들텐데, 그걸 어떻게 모으나.?', '저거 하려면 지금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는 데, 그래도 나름 이 모습도 좋은데' 흔히 말하는 갈등이다. 여기서 갈등은 A,B의 선택 앞에 선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현 자신을 어떻게든 변화 시킬 거라는 두려움이기에 고통스럽다.


그래서 꿈의 이면에는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거침없이 전진하는 힘도 가지고 있으니, 꿈은 꿈일 뿐이더라는 것은 그래서 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나의 반영이며 이를 필연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기에, 반드시 성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배고프면 우리는 먹는다. 먹는다는 것은 배 부르자 하는 꿈을 향하여 가는 과정이다. 또한 정확하게 작동을 한다. 그래서 꿈은 나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이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단어의 구성

다른 계절보다 유독 봄은 남-녀의 심정에 설레임이 가득한지 사랑도 많이 시작하지만, 이별 또한 많은 지 길거리에 싸움이 한가득 하다. 사랑이 남-녀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게도 하지만, 남과 녀라는 단어에도 그것이 있다.


남성-여성이라는 단어를 보면 성이라는 공통적인 단어가 들어가 있게 되는데,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구별 기준을 성으로 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구별 기준이 다르면 안되며 동시에 이것은 양자의 공통 속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서로 다른 것이 공통의 속성 즉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것이 다름을 다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 보편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구별을 만들어 내는지 의문을 할 수도 있는데, 보편성은 애초에 이중적(모순적)이기에 가능하다.


이를 확인할 방법은 실천이 있을 수 있는데, 나름 열심히 사랑하는데, 그때마다 섭섭함을 느끼는 이유는 사랑의 목적은 사랑이 아니라 섭섭함이며 불만족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인에 대하여 이러한 감정을 느끼며 괴롭다면, 사랑이 식어서 그 결과 다른 멋있는 사람이 눈에 확 들어올 시점이기 보단, 오히려 지금 연인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생각엔 옳은 듯하다.

설레임

별 하나 애써 찾을 때
잃어버린 것이 떠 오른다


햇빛을 등져 그림자를 따라 가고 있다는 것

뚜렷한 곳 일수록
잃어버린 것이 또 떠 오른다


고개를 들조차 없는 권태가 그것라는 것


설레임을 상실한 그것은 죽음
애써 별 하나 찾는 것은 결국
그래서.

착각

간혹 경험하는 착각은 혼란스러운 감정과 연이어 자기 반성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를 본다면 착각은 이의 전-후라는 두 개의 세상과 이들이 모두 참으로 있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경험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닌, 자신이 확신하는 바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정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은 직접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세계를 만들고 이를 음미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동어반복적인 생활에 착각은 실제 세계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론은 착각을 자주 하는 사람은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강한 자일 뿐이며, 믿음이 강한 사람은 착각을 통해서 더욱 큰 확신으로 자신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다.

겨울

겨울 바다는 그랬다
그래서 파도는 컸으며 그는 매서웠다


봄 바다는 그랬다
그래서 파도는 장난들을 쳤으며 그는 즐거워 했다


겨울 바다의 나는 그랬다
눈초리는 컸으며 그는 매서웠다


봄 바다의 나는 그랬다
눈가는 장난들을 쳤으며 그는 즐거워 했다


그래서 바다와 나는 닮았다.

실천

언젠가 한 강연장 강사 님께서 "이렇게 하면 되겠죠.? 안되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의지, 실천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정보는 많은데 이를 실천할 힘은 없다는 것.! 이 참에 실천력도 늘릴 겸 해보세요." 결연한 의지의 장이 되어버린 곳을 뒤로 하며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못하는 것을 잘 하는 법'

위 문장을 보면 출발점과 목표점이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를 실현하는 실천 역시 출발점과 목표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표를 이루는 방법과 그의 실천은 동일한 것으로서, 결국 아는 데로 행동하는 현상이 일어남으로 우리는 상대의 행동을 보고 그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의 의미를 다시 본다면, 실천은 그의 출발점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그의 극복이라는 이중(모순)성을 그의 본질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知가 사물과 정확하게 일치하였음 재검증 해주는 결과가 있게 됩니다.


이로서 실천은 의지의 강'약이 문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정보가 옳은 것인지 아닌 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뭔 가를 바라다는 것이 문득 우리의 머리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현재의 자신이 보내는 반영이며, 어떤 것의 출발점이라 생각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부에서 절박함이 뭍어날 수록, 자신을 향한 장엄한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현재의 자신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거울이 추천되지만, 제 개인적은 생각으로는 거울은 요술쟁이라 못난 것은 예쁘게, 예쁜 것은 못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있는 곳을 둘러보는 것인데, 화장품이 유난히 많다면 그 분은 분명 멋쟁이에 미녀일 것이며, 베이비존스과 함께 향수 대신 쓰는 에프터쉐어크림이 있다면 그 분은 몬난이 일 것입니다.

겨울



그것이 녹아 비가 될 쯤
봄은 이내 꽃이 된다


문득 문득 의심의 눈들을 지켜볼 때 쯤
봄은 이내 옷이 되어 가벼워 진다


힐끔거리며 서로를 바라볼 때


봄은 설날의 다짐과 열의를 잊어버린 듯
날개짓 한다 방향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설레이며

전제




어딘가 기억이 없는 곳에서 지나가는 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 문득 '보이는 것 외에 뭔가가 더 있을까 ?' 생각과 함께,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있을까 ?' 의문이 생겼고, 이 의문 자체에 대하여 생각을 했습니다.


의문은 항상 그의 전제를 부정하는 식으로 생긴다고 볼 때에, 그것은 '보이는 것은 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다' 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연관 관계에 대하여 뭐라 하기 전에,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의식이든 ,혹은 그 반대이든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전제가 될 것이며, 그에 맞추어 행동하고 사고하고, 또한 그 결과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함으로써, 자신을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마찰은 또한 '인생은 타와의 경쟁이다'라는 세계관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들이 이해와 실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사고를 세상에서 배웠다 하든, 그 원인을 일단 제쳐두면, 우리의 세계관이 온통 주위의 모든 것들에 가치를 매기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생각은 우리의 사고가 변한다면, 이 세계는 따라서 변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역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결국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는 원인이 되는 이런 순환 구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글을 정리해 본다면, 우리는 전제 없이 어떤 것도 인식(알아차리기, 혹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이를 가능케 하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고요. 이것은 자신을 규정하는 사고의 체계가 교육, 또는 자신 스스로 정한 것이든,


또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술자리에서 격하게 외치든, 말다툼에서 외치든, 혹은 '떠들어라 그래, 난 내 길을 간다'라고 표현되든 간 에요.


전 이것을 '자유의 본질'이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그것에 묶여 허우적거리든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한 삶이므로, 자유롭게 살려고 노력하든 말이죠.

나이를 먹는다는 것.



어린 자식이 "자전거 함께 타자" 하면 ''너 조심히 잘 타는지, 봐야겠다 "며 솔직하게 저질체력을 고백하는 모습을 볼 때면, 지금 저는 제 나이의 삶에 최적화 되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그와 친구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다가 분명 다리에 힘이 풀렸음에도, 계속 인라인을 타겠다고 우기며 다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젊음이란 혹시 두려움과 설레임의 공존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투덜거리는 만큼 웃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는 사물을 바라 볼때에, 그것이 아닌, 자신에서 유래한 반영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에너지를, 의자 깊숙히 앉아 매운 담배 틈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세상과의 적당한 거리를 고심하며 허무한 권태로움이 뼈속 깊숙히 자리잡기를 저는 바라는지 모릅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라는경험으로 그들과 나를 구별하며 이해하려는 것이, 결국은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현 제 모습이 어떻게든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기반성적인 것이 될때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만함과 위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닌가.?생각해 봅니다.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의 것들이 생겨남에도 전문성으로 위로받고, 그 영역에서 자유로운 안위를 느끼며 세상을 음미할 때, 저는 비로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이 만든 정신의 왕국에서 자위하고 있음을 지금의 권태로움이 증명하는 듯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런 생각을 한 저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공감대 형성이라는 매체에 의한 혹은 이 시대가 권장하는 가치일 수도요. 전인적 것에서 그 일부만을 특화시켜 스스로의 완성보단 공동체를 통해서 완성하는 것을 권장하는 시대. 이것이 원인인지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15~16세기에 모든 것에 박식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노장에도 다방면에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들의 개념들은 지금 더욱 세련되고 정밀하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상이였을 지도요.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것은 나이가 원인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지(知)와 知의 실천이 항상 일치할 수 밖에 없는 동어반복적인 구조속에서 그 나이만큼 경험으로 확신되며 고착화되고, 그 결과 이 권태로움은 저와 세상 간의 불일치를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